예르미타시박물관전 관람
2018. 2. 3(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예르미타시박물관전에서 프랑스 미술의 진수를 관람하였다.
이윤봉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2시간 동안 관람하였는데
어찌나 감동인지 제대로 관람하려면 하루 종일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후에 서정의 여혼이 있어서 12시까지로 마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으로 입장하면서
전시장에 입장하여 프론트 홀에서
전시관 입구 통로 벽에 게시된 안내문
제1관 입구에 전시된 예카테리나2세의 초상 (표도르 로코토프, 1736-1808)
<제1관>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
17세기의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위대한 세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젊은 프랑스 화가들이 들어와 왕실 주도의 화단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648년에 설립된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는 보편적인 원리와 질서, 안정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양식을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였씁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나 로마의 고대 예술을 차용하여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주제로 삼았던 니콜라 푸생의 그림이 고전주의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풍경화에서는 클로드 로랭이 고전주의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한 작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고전주의가 17세기 프랑스 화단을 지배했지만 평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렸던 르 냉 형제의 작품도 큰 인기를 얻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피에르 미나르, 1612-1695)
피에르 미나르는 2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는 궁정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뱀이 물도록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를 묘사한 이 작품은 주제와 양식에서 동 시대 이탈리아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전쟁의 원리 (프랑수아 페리에, 1590-1650)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든 전쟁의 신 마르스가 두 마리의 하피(harpy)가 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작품의 오른 쪽에는 여전사이면서 평화로운 삶과 자유로운 예술을 수호하는 미네르바가 방패와 창으로 마르스에 맞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전쟁과 관련된 상징적인 도상이 가득한 이 작품은 신화를 주제로 한 푸생의 1630년대 작품과 구성이 비슷하다.
모세와 타는 덤불 (세바스티앵 부르동, 1616-1671)
부르동의 고향인 남프랑스의 몽펠리에는 신교도인 위그노들의 요새였다. 로마에서 활동하던 그는 카톨릭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배경을 숨기기 위해 종교적 주제를 즐겨 그렸다. 모세가, 타는 덤불에 다가가 신의 호명을 듣는 장면은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기에 맞춤한 소재였다. 부드럽고 섬세한 인물 ㅍ표현은 당시 그가 심취했던 라파엘로의 영향이다.
십자가에서 내림 (니콜라 푸생, 1594-1665)
그리스도가 십자가로부터 내려지는 장면은 바로크 미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하늘을 덮은 거대한 먹구름과 화면을 대각 구도로 분할하는 하얀 천의 극명한 대조에서 바로크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구도와 장중함에서 고전주의 경향도 드러난다. 이 작품은 예카테리나 2세가 1768년 구입한 것으로 그녀가 수집한 가장 이른 시기의 프랑스 미술품 중의 하나이다.
꽃으로 테를 두른 성(holly)가족 (니콜라 피에르 루아르 1624-1677, 장바티스트 모누아예 1634-1699)
모누아예와 루아르는 파리에 머물면서 태피스트리 공방의 주문을 받아 함께 작업했다. 모누아예는 종교적인 주제에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은 꽃 장식 테두리를 두른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이 보이는 마리아와 아이의 모습은 루아르가 그린 것이다.
이 사진은 영상소개 장면을 촬영한 것임
<제2관>
로코코와 계몽의 시대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 속에서 프랑스 화가들은 인간 감정과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씁니다. 이 시기에는 야외에서의 화려하고 우아한 연회 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아카데미의 화가들도 풍부한 색체를 사용하면서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등 점차 새로운 경향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개 무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온 '로코코' 양식이 건축과 장식예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에서 유행했습니다. 한편 1730년대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가족에 대한 가치, 겸손함, 진실한 감정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를 담은 풍속화나 정물화, 초상화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760년대 이후에는 자연과 단순한 생활로 돌아가려는 루소의 사상이 큰 관심을 끌면서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장바티스트 나티에, 1678-1726)
이집트 장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모세서>의 이야기는 18세기 초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소재였다. 특히 침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티에는 옷을 벗은 젊은 부인의 밝게 빛나는 몸을 강조하고, 그림자에 잠겨 있는 요셉을 대조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나티에는 이 작품을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 제출하여 회원 자격을 얻었다.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샤를조제프 니투아르, 1700-1777)
니투아르는 부셰와 함께 르무안을 사사하였다. 행정가로서의 경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을 맡기도 했다. 고대 신화에서 크레타 왕 미노스이 딸인 아리아드네와 포도주의 신 바쿠스가 만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관능미 넘치는 부셰의 화풍으로 작업했던 그의 창작 경향을 보여 준다.
루이 15세의 초상 (장마르크 나티에, 1685-1766)
이 초상화는 1745년 루이 15세가 의뢰한 2점의 초상화 중 하나이다. 나티에는 왕실의 공식 초상화에 보이는 과장된 자세나 복장을 과감히 버리고, 오직 갑옷의 세부 묘사 만으로 프랑스 왕의 존재를 드러내 보였다. 부드럽게 표현된 루이 15세의 얼굴은 강력한 군주라기보다 우아한 귀족의 모습에 가깝다.
<제3관>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
19세기로 접어들어 프랑스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변화의 세기를 맞이합니다. 고전적인 단순함과 조화, 대칭과 정확한 직선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를 계승한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와 프랑수아마리우스 그라네는 로마에서 르네상스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만들어갔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화가들이 개인적인 감성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 개인의 미적 기준이 중시되었습니다. '낭만주의'로 불리는 이 경향이 1820-1830년대에 확산되면서 화가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신비로운 이야기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척점에서 귀스타브 쿠르베는 산업혁명 이후 도시의 일상과 삶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그려냈고, 장바티스 카미유 코로나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로 나간 화가들은 변화하는 빛과 대기에 관심을 두면서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했습니다.
당구시합 (루이레오폴드 부알리, 1761-1845)
이 작품은 프랑스 사회가 격변한 1789년 이후 시기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제1제정기에 당구장은 사람들이 모여 게임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장소였다. 또한, 정치 사회 문제의 토론장이기도 했다. 그림의 주인공은 중앙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 여성이다. 이전에는 남자만 당구 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던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나폴레옹 1세 시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공원의 테라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들 (프랑수아클로디우스 콩트칼릭스, 1813-1880)
콩트칼릭스는 이 작품을 통해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로코코 풍의 패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는 수년간 잡지 '파리식 유행'의 삽화를 담당하였는데 직물을 재현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 (장레옹 제롬, 1824-1904)
제롬은 고대 로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특히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의 주제도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이다. 작품의 중앙에 여자 노예들이 있고, 노예 상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이들을 군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부드러운 붓 터치, 섬세한 묘사와 조각 같은 인물 표현은 제롬이 40년 동안 학생을 지도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보자르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다.
작은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줠 조제프 르페브르, 1836-1911)
줠 르페브르는 로마의 프랑스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고전주의 조각상들을 연구했고, 이후 주로 신화와 종교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1876년 이 작품이 완성되자 동 시대 비평가들은 작품의 인물이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경박한 여인을 연상시킨다고 비판했다.
<제4관>
인상주의와 그 이후
19세기 중엽 이후 고전적 예술 양식과 완전히 결별한 혁신적인 화가들이 등장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이른바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수한 색채로 변화하는 빛과 자연의 움직임, 도시의 일상을 포착하여 현대적 삶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1880년 이후 모네는 대상의 형태보다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색체의 표현에 더욱 집중했고, 폴 세잔은 자연을 본질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탐구했습니다.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 이후 세잔이 사망한 1906년까지를 '후기인상주의'시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는 화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예언자라는 의미의 '나비파'를 이끌던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원시주의 화가 앙리 루소, 1890년대 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물화를 그렸던 이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인상주의 이후의 혁신을 이어나갔고, 이들은 20세기 미술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겨울 궁전 (베르나르 뷔페, 1928-1999)
베르나르 뷔페는 뚜렷한 윤곽선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그래피즘 회화를 제작했던 화가이다. 이 작품은 뷔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원색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그의 후기 경향을 보여준다. 뷔페는 또한 수직선을 활용하여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을 뷔페 특유의 고딕 양식으로 변형 시켰다. 그는 19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개인전을 끝낸 뒤 이미 판매가 된 <겨울 궁전>을 다시 그려 예르미타시박물관에 기증했다.
<예르미타시 미술관>
미술관은 소에르미타시(러시아어: Малый Эрмитаж), 구에르미타시(러시아어: Старый Эрмитаж), 신에르미타시(러시아어: Новый Эрмитаж), 에르미타시 극장(러시아어: Эрмитажный театр), 겨울 궁전(러시아어: Зимний дворец)의 5개의 건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고, 120개의 계단이 있다. 현재 본관의 일부인 겨울궁전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궁이다.
1764년에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한 것이 에르미타시의 기원이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는 "은둔지"를 의미하는 "에르미타시"라고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이름의 유래
'에르미타시'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은둔자를 뜻하는 eremites 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름이 주어진 배경에는 에르미타시 초기, 굉장히 한정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기에 왕과 귀족들간 '은둔자의 집' 이라 불렸던 이력이 있다.
건물
원래, 소장품을 수납한 유일한 건물은 "작은 암자"였다. 오늘날,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궁전 제방 및 그 동네에있는 많은 건물을 포함한다. 소규모 암자를 제외하고 박물관에는 현재 "구 에르미타주"( "대형 암자"라고도 함), "신 에르미타주", "[에르미타즈 박물관]"및 "겨울 궁전 ", 러시아 차르(Tsar)의 이전 주요 거주지였다. 최근 몇년 동안, 암자는 겨울 궁전을 마주보고있는 궁전 광장과 멘시코브 궁전(Menshikov Palace)의 스테프 빌딩[General Staff Building]으로 확대되었다.
역사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시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에르미타시’(은둔지, 인적이 없는 방)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시 명칭의 유래이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小)에르미타시’와 ‘구(舊)에르미타시’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시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新)에르미타시이다.
에르미타시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시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시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